달콤, 살벌한 만남
이유진의 ‘달콤, 살벌한’ 작품세계
류병학 미술평론가
“남자와 여자, 사람과 동물, 사람과 사물들의 표면의 결합은 그 무엇으로도 정의내리기 곤란한 형태를 띤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이성을 통해 신뢰하고 확신하는 인간이나 사물의 모습을 무너뜨려 객관적 실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의심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는 모호한 형태는 단일한 '나', 단일한 '사물' 즉 고정되고 불변적인 단일한 '주체'를 무너뜨리고 언제나 역전 가능한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공포의 권력>에서 말한 '나는 다른 누구(무엇)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등한 하나의 실체로서의 타자, 물질, 대상을 인식하고, 주체 중심,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질이 대립을 초월하고 교감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 이유진의 ‘작가노트’
위 진술은 2018년 이유진의 작가노트 <머리가 발을 만났을 때...(When Head Met Foot...)>에서 인용한 것이다. 머시라? 텍스트 제목이 어디서 본 것 같다고요? 로브 라이너(Rob Reiner) 감독의 영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1989)가 떠오른다고요? 해리(Billy Crystal)과 샐리(Meg Ryan)의 '친구와 연인 사이'가 생각난다.
뭬야?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고요? 필자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사물과 작품은 연인이 될 수 없는가? 이유진의 신작 <머리가 발을 만났을 때...>는 바로 그 점을 관객에게 묻는다. 아니다! 그녀는 사물과 작품에 대한 논의를 오래 전부터 작업해 오고 있다.
2007년 필자는 이유진 작가를 처음 만났다. 당시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갤러리 터치아트에서 이유진 개인전이 잡혀있었다. 그녀는 갤러리 터치아트 개인전 도록 서문을 필자에게 청탁했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녀의 작품을 보기 위해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다. 당시 그녀의 작업실은 분당의 모 건물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가 그녀의 작업실에 들어서니 작업실 여기저기에 ‘요상한 인물’들이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요상한 인물들? 당시 이유진은 인물(특히 여성)을 석고로 캐스팅하여 FRP로 떠낸 후 일명 '아름다운 흉기'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흉기? 2001년 이유진은 표갤러리에서 『아름다운 흉기』라는 타이틀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당시 그녀의 작품은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흉기'였다. 그것은 금과 은 그리고 동으로 제작한 목걸이나 반지 그리고 브로치 등 일명 '액세서리'를 흉기처럼 뾰족하고 날카롭게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필자는 그녀의 ‘아름다운 흉기’들을 보고 완전히 반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아름다운 흉기’는 독특하게도 실용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일종의 ‘액세서리-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아름다운 흉기’는 (금속)공예와 미술의 경계를 해체한 것이 아닌가?
2007년 터치아트에 전시된 이유진의 작품들은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요상한 인물’ 조각들에 ‘아름다운 흉기’를 접목시킨 작품들이었다. 그녀는 2008년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개최한 개인전 『미녀삼총사』에도 인물조각에 ‘치명적인 흉기’를 접목시킨 작품들을 선보였다. 당시 그녀가 라이프 캐스팅(Life casting)하기 위해 선택한 모델은 그녀의 지인들이었다.
그런데 2011년 이유진이 갤러리 인(GALLERY IHN)에서 개최한 개인전 『웰컴 투 비너스(Welcome to Venus)』에 선보인 비너스들은 일반인이 아닌 전문모델을 라이프 캐스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요상한 인물’을 아름다움의 상징인 ‘비너스’로 전이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모델 선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물론 이유진은 세심하게 고려하여 선정한 모델을 라이프 캐스팅한 다음에 신체 부위들을 ‘성형’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녀는 발목과 목 부위를 늘린다든지, 허벅지와 복부 그리고 히프를 탄력있게 만든다든지 혹은 얼굴의 형태를 교정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너스 조각에 ‘아름다운 흉기’를 접목시켜 놓았다.
2018년 이유진은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머리가 발을 만났을 때...(When Head Met Foot...)』에 사람과 사물을 접목시킨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를테면 그녀는 사람의 신체 부분들을 통해 거대한 그릇으로 제작해 놓았다고 말이다. 따라서 사람과 사물의 경계는 해체된다.
이러한 단편적인 정보는 이유진의 작품이 일종의 ‘낯설게 하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그녀의 ‘낯설게 하기’는 우리에게 낯익은 것들을 접목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채택한 낯익은 것들은 서로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비너스에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데 쓰는 도구인 흉기를 접목시킨다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문득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운하임리히(unheimlich)’가 떠오른다. 독일어 ‘unheimlich’는 ‘낯선’ ‘친숙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unheimlich’는 ‘낯익은’ ‘집 같은’ ‘친숙한;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하임리히(heimlich)’의 반의어로 간주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heimlich’의 어원을 추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상이한 뜻을 지녔다는 것을 밝혀낸다.
‘heimlich’는 ‘낯익은’ ‘친근한’ ‘집 같은’ ‘내밀한’ ‘다정한’ 뜻 이외에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숨어있는’ ‘무의식적인’ ‘위험한’ 등의 의미로도 열려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heimlich’는 ‘unheimlich’의 반의어라기보다 오히려 닮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낯익은’ 것이 어떻게 ‘낯선’ 것과 닮았다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낯선’ 것은 예전에 ‘낯익은’ 것이었단 말인가?
프로이트는 그것을 ‘억압된 것의 회귀(Return to the repressed)’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무의식 속에 억압된 것들이 증상이나 꿈 혹은 말실수 등 왜곡된 형태로 귀환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변형된 형태로 표출된 ‘억압된 것’들에 대해 ‘낯익은-낯설음(unheimlich)’이라는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유진의 작품은 의식으로부터 ‘억압된 것’을 위장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왜 그녀는 억압당한 것일까?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억압당한 것일까? 필자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이유진의 작품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당 필자, ‘지뢰’로 가득한 그녀의 ‘달콤, 살벌한’ 작품세계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