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영미 문학의 거장이 펼쳐낸
인간의 이야기, 옥스퍼드 유럽사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백 년 전,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들은 궁금증에 휩싸여야 했다. 눈앞에 놓인 이 유려한 문체와 재기 넘치는 서술의 역사서가 도대체 누구의 저작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은 고대 로마의 성립부터 근대 유럽 국가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그야말로 숨 막히듯 서술해내고 있었다. 마치 욕망이 만들어내는 인간사 스캔들을 탐구하듯, 역사 속 인간과 그 사건을 분석해낸 이 책은 엄밀해야 할 역사책과 흥미로워야 할 소설의 장점을 두루 갖고 있으면서, 교육이라는 목적에조차 더할 나위 없이 충실했다. 거기에 ‘역사란 무엇인가’와 ‘역사에서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의 작품이란 말인가? 알려진 역사가 중에 로렌스 H. 데이비슨Lawrence H. Davison라는 이름은 없었다. 교육자나 문학인 중에서 찾아도 마찬가지였다. 소설가와 평론가, 역사가, 교육자의 역할에 모두 능통한 이 저자의 정체가 알려지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란 것이 있었다.
작가는 당시 창작의 최고 절정기에서 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대학 시절 도와준 은사의 부인과 사랑의 도피를 했다가 도로 잡혀 들어와 몇 년 뒤 가까스로 결혼에 성공했지만, 출간한 책마다 외설 시비를 받고 출간 정지되었고, 독일 국적의 부인은 작가가 활동하는 영국에서 스파이 혐의까지 받고 있었다. 펜을 들 때마다 신들린 듯이 글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의 글들은 무차별 검열을 당하거나 출간조차 불가능했다. 손가락질이 잇달았고, 경제 사정 역시 어려워졌다. 그때 그에게 역사책의 집필 제의를 해온 곳이 바로 옥스퍼드 대학이었다. 한때 교육자였으며, 평론가였고, 화가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인 그에게 고답을 탈피한 일종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집필을 맡긴다는 것은 옥스퍼드로서는 새로운 도전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저자를 찾아낸 선택이기도 했다. 작가는 의뢰를 받자마자 일필휘지로 원고를 완성했고,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출간된 이후 하나의 대학에서 시작된 반향은 어느새 다른 대학과 일반 독자에게까지 퍼져나갔다. 그 책이『유럽사 이야기』이며 작가는 바로 우리에게『채털리 부인의 연인』,『무지개』,『아들과 연인』 등 문제적 소설의 작가로 유명한 D. H. 로렌스다.
저자소개
저자 : D. H. 로렌스
저자 : D. H. 로렌스
영국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 수필가, 문학비평가, 화가.
영국 중부의 탄광촌인 노팅엄셔 카운티의 이스트우드에서 광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맹에 가까운 아버지와 지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어머니, 그리고 극도로 빈궁한 어린 시절은 더없이 찬란해 순수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연환경과 함께 이후 그의 작품에 두고두고 큰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와 함께 민감한 소재를 거침없는 어조로 써 내려간 문제작가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정작 로렌스의 관심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을 그린 『아들과 연인』, 산업화에 따른 인간의 변화를 3대에 걸쳐 추적한 『무지개』 등 급격히 변화한 사회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 군상을 욕망이라는 화두 아래 풀어가는 일에 기울어 있었다. 유명한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역시 자본이 권력이 되는 사회 속에서 중산층과 하층에 집중하여, 이들이 일상 속에서 갖는 위선과 기만 그리고 변질된 욕망 속에 억압되어 있는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회복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1912년 어머니를 여읜 뒤 여섯 살 연상이자 은사 위클리의 부인인 프리다를 만났고, 곧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하다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1914년 정식으로 이혼을 한 프리다와 결혼했으며 이 해에 소설 『무지개』를 출간하지만 비도덕적이라는 이유로 발매 중지를 당한다.
이 책, 『유럽사 이야기』는 교양으로서의 역사를 보여주자는 옥스퍼드 대학의 의뢰를 받아 쓰여졌다. 단순한 연도의 나열이나 사건의 인과관계만을 보여주는 역사 서술을 넘어 역사 그 자체를 관통하는 탁월한 시각과 분석을 보여주기에 로렌스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작가였고, 로렌스 역시 흔쾌히 승낙한다. 그러나 이미 영국 내에서 외설작가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였기에 이 책은 오랫동안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출간되어야 했다.
책은 고대 로마의 성립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유럽 국가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야말로 ‘로렌스답게’ 풀어낸다. 로렌스에 따르면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적 사건의 인과는 사건보다 먼저가 아닌 나중에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여 거기에 순서와 질서를 부여하는 능력을 역사가들이 자부심으로 삼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것은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유추이며,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가설을 ‘진실이라고 우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의 사건은 찾아낼 수 있을지언정, 그 사건의 동기는 어떻게 설명하든 진실이 되지 못하며, 후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동에 잠겨 역사라는 드라마를 지켜보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때 교직에 있었으며 문학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로렌스 말고 이런 작업을 이토록 매혹적으로 완수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달리 없었을 것이다.
『하얀 공작』, 『침입자』, 『무지개』, 『사랑에 빠진 여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 『아들과 연인』, 『처녀와 집시』 등의 소설과 천여 편의 시, 수십 편의 단편 소설과 여행 에세이, 평론, 그림 작품 등을 남겼고, 45세가 되던 해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가슴 깊이 존경심과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멋진 신세계』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