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 무례한 세상 속 페미니스트 엄마의 고군분투 육아 일기
아이들에게 유독 무례한 세상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나답게’ 자랄 수 있기를, 자라서 ‘스스로’가 될 수 있기를! “애가 어쩜 이렇게 얌전해요? 여자애라고 해도 믿겠네!” “남자애라 그런지 씩씩하네!” “아휴, 무슨 여자애가 이렇게 부끄러운 줄을 몰라!” “넌 남자애가 무슨 인형이야, 인형이!”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다면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해봤을 말들이다. 이 문장만 보면 성별이 아이들에 관해 제공하는 정보가 무궁무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세상엔 과연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인 여자아이, 남자아이가 있는 걸까? 왜 얌전한 남자아이는 ‘남자애치고 얌전한 아이’가 되고, 곰 인형 대신 공룡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별난 여자아이’가 되는 걸까? ‘여자답다’, ‘남자답다’의 기준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여자아이라서 핑크색을 좋아하고, 남자아이라서 파란색을 좋아한다는 이 고리타분한 추론은 과연 합리적일까? 저자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가르는 색깔론에 당연한 의문을 품는다. 한 명의 개인은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본인 스스로가 선택하며 본인의 취향을 만들어나간다. 하지만 유독 아이들에게는 성별에 따라 어떤 선택지는 아예 제공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태어날 때부터 성별에 맞게 핑크색 이불과 옷, 혹은 파란색 이불과 옷이 준비되어있지 않나? 또 대형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만 가도 여아 완구는 알록달록한 핑크색, 남아 완구는 무채색으로 가득해 마치 여자아이는 인형 놀이를, 남자아이는 자동차를 좋아하도록 설계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이를 향하는 무례한 시선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다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를 쉽게 만진다는 것. 유아차 속에 조용히 누워 있는 아이를 너무 쉽게 만지는 행동, 또 조금 큰 아이들에게는 뽀뽀 한 번만 해달라고, 손에 쥔 과자를 보며 제발 한 입만 달라고 조르는 등 아이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이런저런 행동을 요구하곤 한다. 그들의 무례한 행동 사이에 아이의 의사는 매번 반영되지 않는다. 저자는 여느 양육자와 같이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자연스레 아이들을 가까이서 만난다. 그때마다 성별이 아이들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정말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듯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야 함을 느낀다. 우리가 어른들에게 성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조심스러운 것처럼, 무언가를 요구하기 전에 항상 의사를 먼저 묻는 것처럼 아이들을 대할 때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성인을 향해 “여자라 핑크가 잘 어울리는구먼!”, “남자가 무슨 춤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걸 안다면, 이젠 아이들에게도 같은 말을 하지 않는 노력을, 아이들에게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는 노력이 말이다. 남편은 좋은 아빠, 나는 그냥 엄마? 이젠 끝없는 ‘엄마 자격 검증 시험’을 끝내야 할 때! ★무례한 세상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한 페미니스트 엄마의 외침 이제 막 엄마가 된 여성들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 급격히 달라진 나의 몸과 마음도 이미 버거운데 엄마를 맘충 아니면 개념맘, 단 두 가지로 정의하는 사회의 시선과 주변 사람들의 무례한 태도에 쌓인 불만은 얼마나 많을까. “젖은 잘 나오냐”라는 말로 인사를 건네고 아이를 키우는 것에 관한 일방적인 지도 편달은 물론, 아이들을 향해 서슴없이 던지는 무례한 말들까지. 인생에 아이 한 명이 더 생겼을 뿐인데, 양육자들에게 세상은 180도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이런 무례한 세상에서 양육자는 어떻게 자신을 지키며 아이와 함께 살아나갈 수 있을까? 아이에게도 여자아이, 남자아이가 여전히 큰 프레임이듯, 이 사회에서 ‘엄마’라는 호칭 속에 숨어있는 잣대는 다른 것들보다 더 냉정하고 무례하다. 아이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건 아빠와 엄마로 두 사람인데, 왜 유독 엄마에게만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식당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엄마는 그냥 엄마지만,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된다. 더욱더 재밌는 사실은 엄마가 육아에 있어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선택지에 비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이 이유식과 반찬을 정성껏 만들어 주면 아이 입맛이 까탈스러워진다며 타박하고, 사다 주면 아이가 엄마가 해준 밥도 못 얻어먹는다고 불쌍하다며 혀를 끌끌 차곤 한다. 대체 어쩌란 말이냐! 결국, 엄마를 향한 사회의 시선이란 이런 것이다. 잘하는 게 기본이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니 딱히 언급할 필요도, 그 수고를 알아줄 필요도 없는 그냥 엄마. 이젠 잘 생각해봐야 할 때다. 이 사회에서 우리가 엄마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었는지, 그들에게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말이다. “양육은 결국 모두의 과업” ★모든 아이와 양육자에게는 조금 더 큰 마을이 필요하다 사회가 강요하고 답습해온 성 고정관념을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은 양육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제아무리 양육자들이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 한들, 어디서 어떻게 쏟아질지 모르는 타인의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다 막아낼 순 없는 노릇이니까.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세상의 모든 말로부터 아이를 지켜낼 순 없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 시대에 필요한 조금 더 큰 마을이란 아이가 아이답게 자랄 수 있는, 기성세대의 편견이나 한계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 그 누구도 어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엄마가 엄마로, 또 아빠가 아빠로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양육자가 현실에 부딪히며 엄마, 아빠로 성장해나가듯, 아이 또한 엄마와 아빠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성장’이라는 과업을 묵묵히 해내며 아직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배워나간다. 아이들은 그저 왜 식당에서 떠들면 안 되는지, 왜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누워 울면 안 되는지 아직 모를 뿐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양육자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조금은 관대한 시선으로, 빙그레 웃어주는 무언의 응원이 아닐까. 그들이 어른들의 방식을 몸에 익힐 때까지 말이다. 아이를 통해 다시금 아이의 세계에 초대된 어른, 저자 박한아는 지난날엔 차마 깨닫지 못했던 세상의 무례한 모습들과 그 안에서 고민하고 성장해온 자신의 이야기를 책 속에서 나눈다. 이 무례한 시대에서 오늘도 아이를 키우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 시대의 모든 여성에게, 이 책은 친구처럼 힘이 되고 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용기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이렇게 하면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습니다!’에 관한 답은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이 세상의 모든 양육자에게 우리의 고민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조금은 평등하고 좋아지길 바라는 육아 동지가 여기 언제나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오늘도 고생하고 있을 여성들에게 이 책을 전하며 건투를 빈다.
여성, 양육자, 페미니스트. 어렸을 적부터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입학한 대학에서는 정작 영화에 마음을 뺏겨 영상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주로 영화제와 서울의 작은 골목들로, 또 각종 리뷰와 비평들로 채워졌다. 이후 읽고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마음으로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4년간의 디지털 미디어 플래너로 일하면서 광고가 언어보다는 숫자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곤 퇴사, 이후 새 삶을 도모하기 위해 떠난 제주에서 엄마가 되었다.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그림이지만 하여튼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한편에는 여성 양육자로서 겪는 부당함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양육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 해내고 싶은 일들이 있다. 지금은 이에 대해 읽고 쓰며 네 살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 ▷ 트위터 twitter.com/excelsiorrrrrr ▷ 브런치 brunch.co.kr/@readsnwrites
프롤로그 : 핑크와 파랑을 벗어난 아이는 훨씬 찬란히 빛난다 1장 무례한 세상에서 육아를 외치다 2장 아이로 키우고 있습니다 3장 아이는 한 뼘씩, 엄마는 반 뼘씩 자란다 4장 아이에게는 더 큰 마을이 필요하다 에필로그 : 양육은 모두의 과업